
전시 제목 : 이단비 개인전 <Hello, My Fear>
전시 작가 : 이단비
전시 기간 : 2022.1.31-2.6
전시 장소 : 갤러리아미디 [아현]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29길 26
전시 소개 :
아름다운 불안의 모양
나에게 있어 불안의 모양은 노이즈 낀 숲과 바다였다.
1월은 한 해의 시작이라고 불리운다. 나에게 2021년 1월은 불안의 모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달이었다. 길을 지나던 시민 분들 덕분에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검사를 받은 후에는 쓰러진 것이 무색할 만큼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왔다.
불안은 항상 졸졸 따라오면서 몸집을 부풀릴 때도, 잠시나마 자취를 감출 때도 있다. 나의 경우 갑자기 불안의 크기가 커질 때면 여지없이 눈 앞이 깜깜했다.
‘눈 앞이 깜깜하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 됨과 동시에 말 그대로 시야가 까맣게 내려앉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몇 초 사이에 노이즈가 나타났다가 소멸한 자리에 암흑이 대신하며 점진적으로 어두워진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보이던 세상에 형광빛 띄는 노이즈가 끼는 광경은 아주 강렬해서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토록 자글자글한 시야의 훼방꾼이 나타나기 직전, 그 때에 발맞추어 이명이 생긴다. 아주 거센 파도의 철썩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 속 거대한 나무의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아주 예민하고 크게 듣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진료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은 이 현상을 전조증상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뒤에 불안이 공포로 바뀌는 시간을 경험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불안의 이동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못지 않게 모든 사람 또한 불안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물론 각자가 가진 불안의 모양과 크기는 각기 다르다. 소리소문 없이 천천히 젖어오는 물과 같을 수도 있고, 아주 뾰족뾰족하게 마음을 찌르는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작업에서 자연이 연상될 법한 모호한 형상과 자글자글한 질감이 불안의 모양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에게도 당신만이 지닌 불안의 모양이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이와 같은 불안의 모양을 띄기도 하고, 혼자만의 독특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불안의 모양을 보고 싶지 않아 덮어둘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불안은 두려움과 아주 친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의 모양 자체를 내 속에서 애써 지워가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불안과 함께 연상되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떠올리며 직면 하다 보니 생각보다 이 모양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회피하지 않은 덕에 불안이 지닌 아름다운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아주 작게 모여 있는 소소한 빛들은 두려움이라는 베일을 벗겨내야만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결국 나의 작업은 당신이 가진 불안의 모양을 마주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위안을 얻기 바라는 마음의 결실이다.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불안이 사실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인 것을 함께 마주하고, 그로써 위안을 얻길 바라고, 그러니 앞으로 살아내는 것 또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전시 제목 : 이단비 개인전 <Hello, My Fear>
전시 작가 : 이단비
전시 기간 : 2022.1.31-2.6
전시 장소 : 갤러리아미디 [아현]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29길 26
전시 소개 :
아름다운 불안의 모양
나에게 있어 불안의 모양은 노이즈 낀 숲과 바다였다.
1월은 한 해의 시작이라고 불리운다. 나에게 2021년 1월은 불안의 모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달이었다. 길을 지나던 시민 분들 덕분에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검사를 받은 후에는 쓰러진 것이 무색할 만큼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왔다.
불안은 항상 졸졸 따라오면서 몸집을 부풀릴 때도, 잠시나마 자취를 감출 때도 있다. 나의 경우 갑자기 불안의 크기가 커질 때면 여지없이 눈 앞이 깜깜했다.
‘눈 앞이 깜깜하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이 됨과 동시에 말 그대로 시야가 까맣게 내려앉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몇 초 사이에 노이즈가 나타났다가 소멸한 자리에 암흑이 대신하며 점진적으로 어두워진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보이던 세상에 형광빛 띄는 노이즈가 끼는 광경은 아주 강렬해서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토록 자글자글한 시야의 훼방꾼이 나타나기 직전, 그 때에 발맞추어 이명이 생긴다. 아주 거센 파도의 철썩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 속 거대한 나무의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아주 예민하고 크게 듣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진료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은 이 현상을 전조증상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뒤에 불안이 공포로 바뀌는 시간을 경험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불안의 이동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 못지 않게 모든 사람 또한 불안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물론 각자가 가진 불안의 모양과 크기는 각기 다르다. 소리소문 없이 천천히 젖어오는 물과 같을 수도 있고, 아주 뾰족뾰족하게 마음을 찌르는 모양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작업에서 자연이 연상될 법한 모호한 형상과 자글자글한 질감이 불안의 모양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에게도 당신만이 지닌 불안의 모양이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다른 이와 같은 불안의 모양을 띄기도 하고, 혼자만의 독특한 모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불안의 모양을 보고 싶지 않아 덮어둘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불안은 두려움과 아주 친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의 모양 자체를 내 속에서 애써 지워가며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불안과 함께 연상되는 이미지를 표현하고 떠올리며 직면 하다 보니 생각보다 이 모양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회피하지 않은 덕에 불안이 지닌 아름다운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아주 작게 모여 있는 소소한 빛들은 두려움이라는 베일을 벗겨내야만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결국 나의 작업은 당신이 가진 불안의 모양을 마주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위안을 얻기 바라는 마음의 결실이다.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불안이 사실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인 것을 함께 마주하고, 그로써 위안을 얻길 바라고, 그러니 앞으로 살아내는 것 또한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